곤충의 눈으로 본 세상

황영조 선수와 나비의 진화

podys 2008. 9. 18. 20:34

1992년은 바르셀로나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해입니다.

 

이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을 함으로써 우리 국민들에게 많은 감동을 선사했지요.

 

일장기를 달고 뛸 수밖에 없었던 손기정 선수 이후에 처음으로 마라톤에서 우승을 했기 때문에 나라 안팎이 떠들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으레히 그렇듯, 고국에서 TV를 통해 우승 장면을 지켜보던 황영조 선수의 고향마을과 가족들을 기자들이 취재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던 사람들 모습이 TV화면에 비춰졌습니다.

 

한동안 떠들썩하던 기분이 진정이 되면서 사람들은 황영조 선수가 어떻게 그토록 달리기를 잘 할 수 있었는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이 때를 놓칠새라 기자들이 이런 관심사를 취재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떤 기자가 황영조 선수의 주변을 취재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강원도 바닷가 초곡항이 고향인 황영조 선수는 어머니가 해녀였나 봅니다. 바다에서 전복도 따고, 미역도 채취하는 해녀 말이지요.

 

해녀들은 물질을 하기 위해 오랫동안 숨을 참으며 잠수를 해야 하기 때문에 폐활량이 극도로 증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바닷가에서 살면서 폐활량을 늘이는 훈련을 한 어머니를 두었으니 그를 닮았을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을 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이런 기사를 들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요. '그래, 그런 어머니를 두었으니 폐활량이 클 테고 당연히 달리기를 잘 할 수 있었을 게야...' 하면서 말이지요.

 

혹시 이 기사를 보고 '내 아이를 마라톤에서 우승하게 하기 위해 나도 해녀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어머니가 있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그럴듯한 기사지요.

 

그런데 이 기자 기사 쓸 것이 어지간히 없었나 봅니다. 이런 기사야말로 혹세무민의 전형이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황영조 선수가 잘 달리는 것과 어머니가 해녀 일을 하면서 폐활량을 늘여온 것과는 무관한 일이랍니다.

 

왜냐하면 황 선수의 어머니가 물질로 훈련을 한 시기가 대부분 황선수가 태어난 이후일테니 상관없는 일인데다가, 황선수가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가 물질을 하면서 폐활량을 키워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유전과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거든요.

 

이것을 '용불용설'이라고 한답니다.

 

이 용불용설은 진화론의 시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이론이랍니다.

 

용불용설이란 자주 써서 발달한 기관은 계속 발달해서 자녀에게 그 형질이 유전되어 계속 발달한다는 이론인데 이것은 틀린 이론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머리를 계속 많이 쓰게 되면 나중에 머리가 매우 큰 인류가 탄생하게 될까요?

 

저도 이걸 알아차린 게 그로부터 한참이나 후였으니 생물 시간에 어지간히 졸았었나 봅니다.

 

정확한 표현이 되려면 황 선수의 어머니가 타고나기를 폐활량이 크게 태어난 데다 그런 어머니를 닮아서 황 선수도 달리기를 잘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야 하지요.

 

이게 어떤 차이일까요?

 

용불용설이 맞는 이론이라면 손가락을 다친 어머니가 아이를 낳으면 손가락을 타고날 때부터 다친 아이가 태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지요.

 

진화론의 시각은 용불용설과는 다르게 어떤 특이 형질을 가지고 있는 개체가 어떤 계기로 태어나고, 후세에 그런 유전 형질을 전달하는 게 유리할 경우 이 형질은 계속 유전되고 불리할 경우에는 도태된다는 것이랍니다.

 

두 가지가 좀 다르지요?

 

태어난 이후에 습득한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답니다.(유전자 변형된 경우 말고요.)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면 아이들이 읽는 상당히 많은 책에서 이 개념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태와 진화에 대한 이야기를 일부 포함하고 있는 책들에서 이런 오류가 발견되는 경우는 대부분 글을 쓴 사람이 이런 개념을 명확히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태와 관련되지 않은 어린이 동화에서도 이런 오류가 자주 눈에 띕니다.

 

만약 아이들 책꽂이에 그런 책이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뽑아서 휴지통에 버려주세요.

그런 개념의 혼동 때문에 논리적이지 못한 아이가 될 수 있으니 그런 책을 읽히는 것은 좀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지요.

 

오늘은 서론이 길었네요.

 

자, 그러면 진화의 개념에서 다시 살펴볼까요?

 

삶이란, 그리고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기 위한 경쟁은 진화의 역사에서 심각한 생존 투쟁으로 표현할 수 있지요. 특히 곤충처럼 연약한 생명체는 대부분 다른 생명체의 먹이가 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유전자를 전달할 수 있는지 여부가 결정되게 됩니다.

 

어떻게든 어른벌레가 되기까지 살아 남아서 다른 개체들과 경쟁을 하고, 그 경쟁에서 이겨서 자신의 유전자를 남겨야 하지요.

그래서 애벌레 시절에 주변색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닮은 녀석들도 나타나고 살아남기 위해서 재빨리 숨는 방법을 찾은 녀석들, 메뚜기처럼 다가가면 냅다 뛰어버리는 녀석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지요. 그게 살아남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지요.

 

물론 짝에게 잘보이기 위해 몸이 변한 녀석들도 있습니다. 천적인 새에게 눈에 잘 띄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날개에 화려한 무늬로 치장을 한 나비도 이런 경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이해가 안 되는 곤충들이 가끔 눈에 띕니다. 물론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면 알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요.

 

곤충의 특성을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아이들이 답안지를 외우듯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몸이 머리, 가슴, 배로 나뉘어 있고, 다리는 여섯 개가 달려 있고....

 

특히 곤충의 다리 여섯 개는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무언가를 할 때 팔이 두 개 더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 적이 많았거든요.

 

저처럼 10년 넘게 독수리타법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이 손이 두 개 더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두 손으로 타이핑하면서 한 손으로는 마우스를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커피를 마시고 말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부러운 다리 두 개를 떼어낸 녀석들이 나비 중에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이유에선지 앞 다리 두 개가 흔적만 있을 정도로 짧아서 다리를 쓸 수 없는 녀석들이 나타난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이 훌륭하게 살아남았지요. 바로 네발나비과의 나비들입니다.

 

주변 환경이 어땠길래 네 발로 살아가는 것이 더 유리했을까요?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바로 이녀석입니다.

 

 

 

 

네발나비과의 나비중에 하나인 작은멋쟁이나비가 꿀을 빨고 있는 모습입니다.

 

다리 네 개로 꽃 위에 �아 있는 모습이 어쩐지 어색하기도 하고 위태로워 보이기도 합니다.